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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어''' - 중일 전쟁과 제3차 국공 내전 이후 난징의 국민당 정부와 충칭의 공산당 정부로 분단되어 있는 중국에서는 정치적 상황에 따라 언어가 다르게 쓰이고 있습니다. 서부 내륙의 중화인민공화국과 동부 해안의 중화민국 모두 공식적으로는 중원에서의 권리를 주장하며 베이징어를 기준으로 한 표준 중국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중화인민공화국 영역이자 간체자(简体字) 사용 범위는 서부 내륙에 국한되어 있습니다.
 
* '''중국어''' - 중일 전쟁과 제3차 국공 내전 이후 난징의 국민당 정부와 충칭의 공산당 정부로 분단되어 있는 중국에서는 정치적 상황에 따라 언어가 다르게 쓰이고 있습니다. 서부 내륙의 중화인민공화국과 동부 해안의 중화민국 모두 공식적으로는 중원에서의 권리를 주장하며 베이징어를 기준으로 한 표준 중국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중화인민공화국 영역이자 간체자(简体字) 사용 범위는 서부 내륙에 국한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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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8월 17일 (금) 16:13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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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

President house tp2

대만총독부 청사

태평양 전쟁의 승전으로 인해, 일본 제국은 더 확장된 형태로 유지되어 오고 있습니다. 본토인 내지와 함께 전쟁 이전부터 유지되던 조선총독부, 대만총독부, 관동청, 남양청에 더해, 전쟁에서 승리해 얻은 영토에 설치된 동태평양총독부, 남태평양총독부를 통해 해외 영토를 통치하고 있습니다. 해외 영토는 내지와 같은 공통법의 적용을 받지만, 공통법의 범주 외에서는 총독이나 장관이 독자적으로 정책을 집행합니다. 식민 통치는 일본인에게도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전쟁으로 넓어진 영토의 변경 지역들에서 러시아나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등의 국가들과 겪는 분쟁은 군부 통치에 유리한 분위기를 조성하며, 특히 육군, 해군, 공군 대장이 역임하는 조선총독은 총리 바로 아래의 정치적 능력의 시험대로 여겨지면서 정계와 내각에서 군부 인사들에게 유리한 여건을 만들어 줍니다.

조선과 대만

일본 제국의 중심 지역들인 내지와 조선총독부, 대만총독부에서는 황민화 정책(皇民化政策)으로 한 세기 가까이 소수 언어, 문화, 역사 등에 대한 정보가 철저히 통제되어 왔으며, 이로 인해 일반적인 한국인과 대만인은 독립적인 언어와 문화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 채, 태어날 때부터 일본어를 쓰고, 일본 문화를 배우고, 자신들이 일본인이라고 알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분명히 존재하는 일본인에 의한 멸시와 차별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진실을 알지 못한 채 이것이 그저 지역 차별일 뿐이라 믿을 뿐입니다.

태평양

비슷한 문화에서 일찍이 황민화 정책이 실행되어 완벽히 일본에 동화된 중심 지역들과 달리, 변방 지역들은 주변국들의 영향력으로 인해 동요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섬 지역들에 일본인들의 이주가 이루어지고 군사 지역들에서는 소개가 이루어졌지만, 주요한 큰 섬들에서는 식민 통치에 대항하는 움직임 또한 나타납니다. 남태평양총독부가 원주민 부족들을 직접 통제하는 형태로 통치를 받던 뉴기니 섬은 오스트레일리아 및 뉴질랜드의 영향력과 전 세계적 탈식민화로 인해 1975년 파푸아뉴기니로 독립해 대동아공영권의 회원국이 됩니다. 동태평양총독부가 통치하는 하와이 제도와 알류샨 제도 일부에는 1960년대 이후 미국의 영유권 주장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세계

동남아시아

USMC-110212-M-4737O-039

미군, 태국군과 공동 훈련을 하는 일본군 병사

일본에 의해 서구 국가들으로부터 독립한 이후로, 동남아시아 각국은 대동아공영권에 편입되어 일본의 자원 기지로서 개발이 이루어집니다. 일본 정부 내의 대동아성을 행정 기구로 두고, 일본군을 주축으로 한 대동아조약기구를 안보 기구로 둔 대동아공영권은 일본의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 이익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태평양 전쟁에서의 일본에 의한 독립과 이후 일본의 통제를 받는 정부들, 그리고 동남아시아에 진출한 일본 산업과 문화들은 대동아공영권 국가들을 일본에 우호적으로, 순종적으로 만들게 됩니다.

태국은 태평양 전쟁 당시에도 추축국의 일원이었으며, 전통적으로 지속되어 오는 군주국으로서 대동아공영권 내에서 독특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불교 군주와 쿠데타로 교체되는 군부가 통치해 오는 태국의 정치는 대동아공영권 내에서 상대적으로 일본으로부터 독립적인 태국의 정치 풍토를 형성합니다.

베트남에서는 대동아공영권 하에서 정부가 수립되지만, 베트민은 중국 동부와 동남아시아를 장악한 일본군에게 총공격을 당합니다. 일본 공정대와 항공 병력을 주축으로 한 1954년의 비엔디엔푸 전투는 베트남 전쟁의 절정을 이루었으며, 이 전투에서 일본군이 승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해군 항공대는 이후 공군성의 설립에큰 영향을 줍니다.

현실에서 태평양 전쟁 기간 정부 수립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지역에는 일본의 지원하에 정부가 수립됩니다. 말레이 연방은 말레이 반도의 술탄국들의 연합체로, 인도네시아는 서파푸아를 제외한 동인도 제도의 섬들으로 이루어진 국가로 수립됩니다.

남아시아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이 승전한 1943년 당시, 인도에서는 반영 운동이 확산됩니다. 버마 전선을 경계로 연합국과 일본 간 평화조약이 조인되자, 인도에서는 동남아시아 각국과 마찬가지로 독립 운동이 더욱 가열됩니다. 일본의 지원을 받은 수바스 찬드라 보스의 자유 인도 임시 정부는 넓어진 지지 기반을 바탕으로 인도에서 세력을 확대하기 시작합니다. 비록 1947년 독립 당시만 해도 자와할랄 네루에 밀려 인도에서 크게 지지를 받지 못했지만, 수바스 찬드라 보스는 인도-파키스탄 전쟁으로 우경화되는 인도에서 주목받습니다. 서구 국가들과 파키스탄에 모두 반감을 가진 인도는 대동아공영권 동맹에 가입합니다.

일본과 중화인민공화국 간의 갈등이 각각의 지원을 받는 인도와 파키스탄 간의 갈등으로 확전되면서, 1960년대 대일본제국과 미합중국 간의 상호 협력 및 안전 보장 조약 조인 이후 미국은 인도-파키스탄 전쟁에도 개입하기 시작합니다. 현실에서의 베트남 전쟁 대신, 1965년 제2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에서부터 본격적 개입을 시작한 일본과 미국은 카슈미르에서 순식간에 파키스탄군을 격퇴하지만, 이후 수년간 소련 및 중화인민공화국의 지원을 받는 파키스탄 게릴라들의 공격으로 전쟁은 장기화됩니다. 무력 충돌은 지속되어 1971년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으로 방글라데시가 독립해 인도 측에 선 이후에도, 인도와 파키스탄은 대치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1983년 스리랑카 내전이 시작되고, 인도와 일본은 1987년부터 스리랑카에 파병하기 시작합니다. 대동아공영권의 총력전을 통해 인도와 일본의 수많은 부대들이 타밀일람 해방 호랑이와의 전투에 참여하고, 스리랑카 내전이 타밀일람 해방 호랑이의 패배로 끝난 이후 스리랑카는 인도 및 대동아공영권 각국과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미국

일본에 의해 태평양의 제해권을 빼앗긴 미국은 태평양 지역의 안보에서 어떻게든 일본과 대치할 수밖에 없는 입장에 놓였으나, 1950년대 이후 냉전의 심화, 그리고 중국 및 베트남에서의 일본의 고전은 일본과 미국 간 관계 개선의 요인이 되었습니다. 대일본제국과 미합중국 간의 상호 협력 및 안전 보장 조약 조인 이후, 미국은 일본과 함께 태평양 지역의 안보 및 경제 파트너가 되고 있습니다. 양국은 태평양에서 공동으로 안보를 책임지며 군사적으로 동등한 세력을 이루고 있으나, 최근에는 일본의 부상으로 인해 얄류샨 제도와 하와이 제도 등 외교 문제도 재점화되고 있습니다.

한편 남태평양의 해상 수송을 보장하고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태평양 안전 보장 조약이 1951년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에 의해 조인되지만, 미국에게 있어 일본의 중요성이 커짐에 따라, 태평양 안전 보장 조약은 현실에서와 같이 거의 기능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부상을 견제한다는 의미로서의 상징성을 아직 유효합니다.

현실에서의 베트남 전쟁에서와 같이, 인도-파키스탄 전쟁에서 수많은 폭격과 대게릴라 전투를 치른 미국은 1970년대 소련 및 중화인민공화국과의 데탕트를 이루면서 1971년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을 기점으로 개입을 중단하지만, 소련 및 중화인민공화국의 지원을 받는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의 이슬람 게릴라들에게 큰 피해를 본 이후였습니다. 미국의 인도-파키스탄 전쟁 개입은 이후 이란 혁명과 엮여 중동의 이슬람 원리주의를 자극하는 배경으로서 작용하며,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을 지원했던 소련은 이후 소련-아프가니스탄에서 고전하게 됩니다.

러시아

Sino-Soviet border conflict May 1969

1969년, 소련 경비정이 만주국 어부에게 물대포를 발사하고 있다.

태평양 전쟁에도 불구하고 일소 중립 조약은 장기간 유지되지만, 냉전 시대의 갈등은 일본과 소련 간에도 예외는 아닙니다. 일본과 소련 간의 관계는 현실에서의 소련과 중국 및 일본 간의 관계와 비슷합니다. 소련은 제2차 국공 내전과 제3차 국공 내전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을 지원하면서 일본과 외교적 갈등을 빚기 시작하고, 1950년대 후반 사할린과 쿠릴 열도 국경 분쟁이 재점화되면서 일본과의 외교관계는 악화일로로 치닫습니다. 1960년대 대일본제국과 미합중국 간의 상호 협력 및 안전 보장 조약 조인과 만주 국경 분쟁은 소련과 일본을 전쟁 직전까지 몰아넣습니다. 소련 붕괴 이후에도 극동 국경 지대에서는 러시아 극동군과 일본 관동군이 대치하고 있으며, 국경 분쟁은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유럽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미국이 하와이와 태평양의 제해권을 잃게 되자, 서구 연합군은 유럽 전선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없게 됩니다. 일본에게 진주만을 잃고 파나마 운하를 봉쇄당하며 태평양 지역 해군력을 완전히 상실한 미국은 일본과의 강화조약 이후 유럽 전선에 투입된 해군력의 일부를 태평양으로 돌립니다. 연합군 해군력의 분산 이전부터 진행된 북아프리카 전역에서는 승리를 거두나, 이탈리아나 프랑스 등 유럽 대륙으로의 상륙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연합국들은 대신 유럽 대륙으로의 전략 폭격에 집중합니다.

동부 전선에서는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 소련군의 반격이 이루어지나, 육군 병력을 온전히 동부 전선에 집중할 수 있던 독일이 쿠르스크에서의 공세에 성공하면서 동부 전선은 이후에도 장기간 독일과 소련의 공세가 반복되는 공방전의 양상을 띄게 됩니다.

1945년, 독일의 총력전 체제와 로켓 개발 등으로 점차 더 치열해지는 전쟁을 끝내기 위해, 미국은 맨해튼 계획으로 개발한 원자폭탄을, 현실에서의 일본 대신, 독일에 투하합니다. 연합국의 원자폭탄 투하와 소련군의 독일 본토 진입으로 독일은 항복하고, 프랑스에서부터 진주한 연합군은 소련군과 함께 독일을 분할합니다. 이후 유럽에서는 동서독 국경을 경계로 서방 국가들과 소련 간의 냉전 체제가 이어집니다.

독일은 무조건 항복을 택했지만, 패전과 함께 많은 독일 고위 인사들이 일본으로 도피했습니다. 추축국의 일원으로서의 역사로 인해 일본은 독일에 우호적이고, 망명한 독일 인사들이나 일본에서 장기간 유지된 군국주의 체제는 현대 유럽에서 제2차 세계 대전에 대한 역사적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중국

대륙타통작전의 성공으로 일본군이 중국 해안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중국과 일본 간 강화조약이 조인되면서 중일 전쟁이 끝난 직후, 중국 대륙은 충칭을 수도로 한 서부 내륙의 중화민국, 동부 해안 일본군 점령지의 난징을 수도로 한 중화민국 남경국민정부, 동북부의 만주국과 몽강으로 분리됩니다. 수년간 연합국들의 지원을 받으면서 일본에 대항한 중국이지만, 동부 해안 전체를 일본에게 빼앗긴 굴욕적 패배는 충칭 국민당 정권의 지지도를 바닥으로 끌어내립니다. 결국 강화조약 조인 다음 해에 제2차 국공 내전이 일어납니다. 공산당은 순식간에 서부 내륙을 장악한 후 중화인민공화국을 선언하고, 국민당은 도피하다가 최후의 수단으로 일본에 정권의 보호를 요청하고 남경국민정부와의 통합을 선택합니다.

만주국은 일본의 승전 이후 중화민국에서 독립을 승인했지만, 중국 대륙 전체를 영토로 주장하는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독립을 승인하지 않고 있습니다. 유엔에서도 만주국의 국가 승인 문제를 놓고 동서 간 의견이 충돌하고 있습니다. 만주국은 일본 정부와 관동군의 통제 하에 빠르게 경제를 발전시키며, 남만주철도주식회사와 닛산 콘체른 등 수많은 일본 기업과 일본인들이 진출해 있어, 일본의 산업 기지로서 운영되고 있습니다.

현재 중국 대륙에는 중화민국, 중화인민공화국, 만주국 세 나라가 들어서 있습니다. 해안의 중화민국과 내륙의 중화인민공화국의 대치 상황은, 현실에서의 한반도 분단과 비슷하게, 냉전 시기 제3차 국공 내전 등 휴전선을 사이에 둔 양측의 충돌과 소련과 일본, 나아가 미국 간 대리전의 양상을 띄게 됩니다. 이후 중화민국은 대동아공영권 및 서구 경제권에 포함되어, 일본의 통제를 받는 국민당 정권의 지도하에 경제 발전을 이룹니다. 하지만 국민당 정권의 지속된 개발독재 아래서, 일반적인 중국인들의 생활 수준은 낮은 상태입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냉전 시기 소련과 연합해 일본 및 미국에 대항한 이후,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 당시 미국과의 데탕트가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중국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소련에 크게 의존하던 중화인민공화국은 소련 붕괴 이후 핵 개발과 변경 지역의 충돌 등으로 갈등을 겪고 있으며, 분열된 중국은 서로 간의 대치에 국력을 소모하고 있습니다.

정치

일본의 정치는 20세기 초와 같이 일본 제국 헌법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현실에서의 전후 일본국 헌법과 달리, 일본 제국 헌법 하에서 천황은 매우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천황은 최고 통치자이며, 내각, 제국의회, 재판소 모두 천황을 보좌하는 기구로서 기능하고 있습니다. 특히 군 통수권이 천황에게 있다는 점은 군부가 내각과 독립적으로 행동할 수 있게 합니다. 현실의 일본 국회와 달리, 일본 제국의회 또한 하원인 중의원만 국민들에게 열려 있습니다. 상원인 귀족원은 황족, 화족, 칙선 의원들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940년 설립된 대정익찬회는 현실의 자유민주당과 비슷하게 일본 정계를 지배하는 거대 보수 정당으로 유지되어 오고 있습니다. 자유민주당과 같이, 대정익찬회 내에서는 파벌에 따라 인사와 정책 결정이 이루어집니다. 공산당 등의 무산 정당이나 자치 및 독립을 주장하는 정치 운동은 치안유지법에 따라 금지됩니다.

태평양 전쟁 시기까지 지속적으로 팽창한 일본 제국주의와 군부의 영향력은 현재까지 일본 정치를 지배해 오고 있습니다. 일본 제국 육군, 일본 제국 해군, 그리고 해군 항공대를 전신으로 하여 1954년 베트남 전쟁을 계기로 창립된 일본 제국 공군으로 이루어진 일본 군부는 내각과 독립적으로 행동하면서, 사회 각 분야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일본 제국은 현실의 한국과 비슷하게 징병제, 예비군, 국민등록제도 등을 유지하고 있으며, 군부 내 파벌 간 대립과 쿠데타의 중재는 현실의 태국과 비슷하게 군주의 승인을 받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일본 제국은 태평양 전쟁 이후에도, 현실의 한국과 비슷한 반공주의와 개인 통치를 통해, 군부 통치와 개발독재를 지속합니다. 도조 히데키 총리 이후 수립된 육군성 내각은 태평양 전쟁의 승전으로 유지되지만, 1950년대 제3차 국공 내전과 베트남 전쟁에서의 고전으로 인해 해군-공군 내각으로 교체됩니다. 해군-공군 내각은 보수적인 육군성 내각과 달리 개혁 정책과 대미 관계 개선을 추진하며 대일본제국과 미합중국 간의 상호 협력 및 안전 보장 조약에 조인하지만, 현실과는 달리 우익 민족주의에 기반한 반미 운동인 안보투쟁에 의해, 1960년에 붕괴하고 다시 육군성 내각이 수립됩니다. 이후 육군성 내각을 중심으로 반공 및 친미 정책과 경제 개발이 이루어져 왔으며, 1990년대 버블 붕괴 이후 정계가 개편되면서 해군과 공군 또한 정계에서 영향력을 넓히고 있습니다.

외교

1943년 강화조약을 통해 일본과 서구 연합국들 간의 전쟁이 종결된 이후, 일본과 서방 국가들은 다시 서로 협력적이고 긍정적인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습니다. 냉전기 반공 정책과 일본의 경제 성장은 외교적, 경제적으로 양측의 협력을 도왔으며, 이는 안보 협력으로도 이어지게 됩니다. 1960년 대일본제국과 미합중국 간의 상호 협력 및 안전 보장 조약이 조인된 이후, 일본과 미국은 태평양의 양강으로서 서로 대등하게 태평양을 지켜오고 있습니다. G7의 회원국이자 1971년 이후 유엔 안전 보장 위원회 상임 이사국이 된 일본은 경제적, 정치적으로 서방의 편을 들어 왔습니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의 무역 갈등, 그리고 냉전 이후 일본의 영향력이 점차 커지면서 새로운 초강대국으로 주목받는 상황으로 인해, 일본과 미국 간의 경제적, 군사적 경쟁은 심해지고 있습니다.

서방과의 관계와는 달리, 동구권 국가들과의 관계는 긴장 상태입니다. 대동아공영권의 최전선은 일본-만주국-몽강-중화민국을 따라 러시아-몽골-중화인민공화국과 군사적 대치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러시아는 쿠릴 열도와 사할린을 두고 일본과, 극동 국경을 두고 만주국과 분쟁을 벌여오고 있으며, 중화인민공화국은 휴전 이후에도 휴전선을 따라 중화민국과의 충돌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언어

  • 만주어 - 만주국 수립 이후, 만주어는 만주국 조정을 중심으로 계속 이어져 왔습니다. 중국 대륙과는 독립적인 국가로 운영해야 한다는 일본의 제국주의적 필요성에 따라, 만주어의 유지와 교육은 계속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독립된 몽강에서의 몽골어 사용도 제한을 받지 않고 있습니다.
  • 일본어 - 일본의 패망과 전후의 개혁 정책이 이루어지지 않기에, 일본어에서 당용한자(当用漢字) 및 상용한자(常用漢字)에 기반한 신자체(新字体)와, 발음에 중점을 둔 현대 가나 표기법은 공식적으로 도입되지 않으며, 일본어는 전통적, 보수적인 표기법을 따르게 됩니다. 따라서 일본어의 공식적 표기 체계는 현재도 역사적 가나 표기법과 번체자로 쓰이는 구자체(舊字體)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20세기, 특히 1960년대 이후 대중들을 중심으로 현대 가나 표기법과 약자가 널리 쓰이고 있지만, 공문서를 중심으로 한 공식적인 표기는 구자체와 역사적 가나 표기법, 그리고 일본어의 문어체(文語體)를 따르고 있습니다. 또한 일본 제국의 식민 통치와 함께 계속되어 온 황민화 정책으로 인해, 한국어, 아이누어, 류큐어 등의 소수 언어들은 한 세기 가까이 사용 자체가 금지되고 있습니다. 이들 주민들의 이름은 창씨개명(創氏改名)을 통해 일본식으로 바뀌며, 소수 언어들은 정부의 통제와 처벌으로 인해 일반 대중들에게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채 음지에서 사멸해가고 있습니다. 반면 일본어는, 일본의 영향력으로 인해 대동아공영권 내 국가들에서 널리 교육되어 사용되고 있습니다.
  • 중국어 - 중일 전쟁과 제3차 국공 내전 이후 난징의 국민당 정부와 충칭의 공산당 정부로 분단되어 있는 중국에서는 정치적 상황에 따라 언어가 다르게 쓰이고 있습니다. 서부 내륙의 중화인민공화국과 동부 해안의 중화민국 모두 공식적으로는 중원에서의 권리를 주장하며 베이징어를 기준으로 한 표준 중국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중화인민공화국 영역이자 간체자(简体字) 사용 범위는 서부 내륙에 국한되어 있습니다.